
도입 — 옳은 말을 했는데 사람을 잃을 때

사람과 오래 살다 보면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 어려운 잘못을 만나게 됩니다. 가족이 약속을 반복해서 어기거나, 성당 모임의 책임자가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거나, 가까운 교우가 마음 아픈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참아야 할지, 따져야 할지 몰라 마음속에서 여러 번 대화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당사자에게 말하기보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먼저 하소연합니다. 잠깐은 속이 시원하지만 이야기는 조금씩 퍼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보다 상처와 불신이 더 커지기도 합니다.
2026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복음은 마태오복음 18장 15절부터 20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했을 때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가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누가 옳은지 공개적으로 판정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잘못으로 멀어진 사람이 다시 형제로 돌아오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 13장 8절부터 10절은 이 가르침의 중심을 밝혀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로 사랑하는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으므로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일도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대의 존엄을 훼손하며 옳음을 주장한다면 계명의 글자는 지켰다고 생각해도 그 정신을 놓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 — 잘못한 사람도 여전히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갈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꿉니다. 상대의 행동은 분명 잘못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잘못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형제입니다.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상대에게 이름 대신 꼬리표를 붙이기 쉽습니다. ‘무책임한 사람’, ‘욕심 많은 사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한 번 붙은 꼬리표는 상대의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형제라고 불러 주십니다. 잘못을 분명히 보면서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복음적 시선입니다.
타이름의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 안으로 다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을 들으면 내가 논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형제를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말의 내용뿐 아니라 시간, 장소, 표정, 목소리까지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면 상대는 잘못을 돌아보기보다 자신을 방어하게 됩니다. 조용한 자리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진실을 들을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복음적 충고의 성공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잘못을 솔직히 말하면서도 상대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두고, 우리 사이에 다시 ‘형제’라는 이름이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진실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공동체를 회복시킵니다.”
단둘이 만나라는 지혜 — 존엄을 지키는 진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첫 단계는 단둘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갈등을 숨기거나 책임을 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를 가장 작은 범위에서 정직하게 다루어 불필요한 상처를 막으라는 지혜입니다. 제삼자에게 먼저 말하면 사실에 감정과 해석이 더해집니다. 듣는 사람도 자기 경험을 보태고, 어느새 당사자는 해명할 기회조차 없이 나쁜 사람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직접 대화할 때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감정이 너무 격하다면 바로 만나지 말고 시간을 두어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적은 뒤 인격을 공격하는 표현을 지웁니다. “당신은 원래 이기적입니다”가 아니라 “지난 모임에서 제 의견을 듣지 않고 결정했을 때 저는 존중받지 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 전체에 대한 판결 대신 구체적인 사실과 내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도 말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피곤함이나 가족 돌봄, 건강 문제처럼 알지 못한 사정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는 것은 잘못을 무조건 인정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사실을 더 정확히 알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폭력, 학대, 성범죄, 사기, 생명과 안전에 관계된 문제는 예외입니다. 이런 문제를 피해자 혼자 단둘이 해결하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즉시 안전을 확보하고 본당 책임자, 가족, 전문기관, 수사기관 등 적절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복음은 피해를 숨기게 하지 않으며,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동체의 도움 — 내 편이 아니라 화해의 동반자
단둘의 대화로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는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때 사람을 데려가는 목적은 숫자로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을 공정하게 확인하고 양쪽이 미처 듣지 못한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중재자는 내 편을 들어 줄 사람보다 신중하고 지혜로우며 양쪽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라면 단장, 구역장, 사목회 책임자나 사제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가족 갈등이 오래되었다면 신뢰받는 가족 어른이나 상담 전문가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중재자는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정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대화가 다시 가능하도록 안전한 질서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교회에 알리는 단계도 말씀하십니다. 개인적 감정으로 공개하라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가 책임 있게 분별하고 보호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는 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소문으로 사람을 매장해서도 안 됩니다. 회개할 기회와 피해 회복, 공동체의 안전을 함께 살피는 성숙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파수꾼으로 부름받습니다. 파수꾼은 위험을 보고도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알리는 목적은 사람을 겁주거나 벌주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필요한 말을 회피하지 않되, 상대를 사랑하는 책임으로 말해야 합니다.
이미지 프롬프트: 16:9, 한국 성당 친교실, 갈등 중인 70대 교우 두 명과 중간에서 양쪽 말을 공정하게 듣는 온화한 또래 중재자, 모두 단정한 여름 반팔 복장, 원형 테이블과 따뜻한 햇살, 사실적 사진, 글자·로고 없음.
이미지 설명글: 지혜로운 중재자는 누구의 편을 늘리는 사람이 아니라 화해의 길을 함께 찾는 동반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 침묵과 정죄 사이의 길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을 단지 부드러운 감정으로만 이해하면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사랑과 반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상대가 자신과 공동체를 해치는 길로 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때에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합니다.
동시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복수하거나,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주거나, 사실을 과장해 퍼뜨리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분노를 풀기 위해 타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면서도 상대의 존엄과 회복 가능성을 지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침묵과 정죄 사이의 좁지만 아름다운 길을 걷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편할 때도 있지만 관계가 병들 수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형제를 잃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준비하고,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상대의 대답을 오래 듣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이 수고가 바로 우리가 평생 갚아야 할 사랑의 빚입니다.
시니어 생활 사례 — 장부의 빈칸을 소문내지 않은 교우

한 70대 남성 교우가 본당 봉사 모임의 회계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는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어느 날 장부를 정리하다가 지출 한 건에 영수증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담당 교우가 일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임원에게 먼저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사자보다 주변 사람에게 먼저 말하면 작은 착오가 큰 의심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담당 교우에게 전화를 걸어 “장부에서 제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 둘이 확인해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성당 친교실에서 만났습니다.
담당 교우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병원을 오가다가 영수증 제출을 잊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수증은 가방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과했고 장부는 곧 정리되었습니다. 회계를 맡은 교우도 의심부터 했던 마음을 솔직히 말하며 미안함을 전했습니다.
문제는 십 분 만에 해결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담당 교우의 명예가 지켜졌고 두 사람의 신뢰도 더 깊어졌습니다. 만약 여러 사람에게 먼저 “장부가 이상하다”고 말했다면 해명이 끝난 뒤에도 의심의 흔적은 남았을 것입니다. 복음적 대화는 거창한 설교보다 이렇게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실천 — 형제를 얻는 세 문장

오늘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전화를 걸기 전에 수첩에 세 문장을 적어 보십시오. 첫째, “제가 분명히 확인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추측과 소문을 빼고 직접 보고 들은 사실만 적습니다. 둘째, “그 일로 저는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난 대신 서운함, 걱정, 당황스러움 같은 내 감정을 표현합니다. 셋째, “앞으로 이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부탁을 적습니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왜 그렇게 하셨어요?”보다 “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으니 먼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해 보십시오. 상대가 말할 때는 적어도 3분 동안 끊지 않고 들으십시오. 답변을 준비하며 듣지 말고 이해하려고 들으십시오. 대화가 격해지면 잠시 쉬었다 다시 만나는 것도 지혜입니다.
오늘 당장 직접 만나는 것이 어렵다면 험담 한 번을 멈추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성당에서 혼자 있는 교우에게 인사하거나, 미사에 오지 못한 교우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십시오. “오늘 기도 중에 교우님을 기억했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이 짧은 문장도 외로운 사람을 다시 형제로 얻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기도와 결론 —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대화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화해를 위한 대화의 자리에 주님께서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 힘으로 완벽한 말을 만들어 내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상대를 형제로 바라보며, 필요한 한 걸음을 내디디면 됩니다.
모든 관계가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과를 거절당할 수도 있고 대화를 다시 시도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신뢰가 깨진 경우에는 안전한 경계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잘못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화해는 양쪽의 진실한 노력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결과를 억지로 만들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책임을 다한 뒤 나머지를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사랑이신 주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제 의로움을 세웠던 저를 용서하소서. 험담을 멈추고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다가갈 용기를 주소서. 진실을 숨기지 않되 상대의 존엄을 지키게 하시고, 제 말을 줄이며 그의 사정을 듣게 하소서. 갈등으로 멀어진 가족과 교우가 주님 안에서 다시 형제가 되게 하시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은 한 사람을 이기려 하지 말고 한 형제를 다시 얻어 보십시오. 직접 대화할 수 없다면 그를 위한 기도와 험담을 멈추는 일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완성하고 공동체를 다시 살립니다.
고감사, 참! 고맙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