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입 — 마음이 닫히면 모든 말이 불편해집니다.

어떤 날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가족이 건강을 걱정하면 잔소리처럼 들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관심이 없다고 서운합니다. 성당에서 따뜻한 위로를 들으면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회개를 권하는 말씀을 들으면 너무 엄격하다고 느낍니다. 상대가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내 마음이 이미 닫혀 있는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2026년 9월 16일은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이날 복음은 루카복음 7장 31절부터 35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 사람들을 장터의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습니다. 기쁜 초대에도, 슬픔의 초대에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조건만 찾다가 정작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과 말씀을 모두 밀어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왜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상황이 완벽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을 내려놓기 싫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자신을 비난하라고 주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굳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사랑의 길로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의 배경 — 피리와 곡소리에도 응답하지 않은 세대

예수님 시대의 아이들도 장터에서 어른들의 혼인 잔치나 장례 모습을 흉내 내며 놀았을 것입니다. 한 무리가 피리를 불며 즐거운 놀이를 제안하면 다른 아이들이 춤추고, 슬픈 노래를 부르면 함께 우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아이들은 어느 쪽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면 함께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절제하며 회개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지나치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특히 세리와 죄인으로 불리던 이들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엄격한 요한도 싫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예수님도 싫었습니다.
이 장면은 비판의 대상이 실제로 문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문제였음을 보여 줍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요한을 받아들이면 삶을 고쳐야 했습니다.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멸시하던 사람을 형제로 바라봐야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기중심적인 기준을 내려놓아야 했기에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에서 듣고 싶은 말씀만 찾을 수 있습니다. 축복과 위로는 좋아하지만 용서와 나눔은 부담스러워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계획을 도와주시기를 바라지만, 내 계획을 바꾸라는 초대에는 귀를 닫습니다. 말씀은 내 생각을 꾸며 주는 장식이 아니라, 나를 하느님의 방향으로 바꾸는 빛입니다.
제1독서 — 사랑이 없으면 소리만 남습니다.

코린토 1서 12장 31절부터 13장 13절은 흔히 ‘사랑의 찬가’라고 불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를 말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언하는 능력과 깊은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씀은 능력과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은사가 사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을 잘하는 능력은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지식은 다른 이를 무시하는 근거가 아니라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나만 구원받았다는 우월감이 아니라 약한 이를 붙들어 주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구체적인 동사로 설명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 친절합니다.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막연한 좋은 감정이 아니라 매일 선택하고 연습하는 태도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내가 얼마나 많은 말을 아는가보다, 그 말이 가까운 사람을 얼마나 살리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믿음이 크다고 말하면서 가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기도를 오래 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사랑의 길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며, 사랑은 오늘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두 순교 성인 — 갈라짐보다 일치를 선택한 사랑

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외부의 박해뿐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박해가 두려워 믿음을 저버렸다가 다시 돌아오려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엄격한 쪽에서는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르넬리오 교황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에게 교회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는 이 과정에서 고르넬리오를 지지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 힘썼습니다. 두 성인은 죄를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이를 다시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일치는 모든 차이를 덮는 적당한 타협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지키면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동체를 찢기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지키는 일을 앞세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박해 속에서 고난을 겪고 순교로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본당에도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례 방식, 봉사 방법, 가족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립니다. 일치를 지키려면 무조건 침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꺾어야만 내가 옳아지는 방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실을 말하되 모욕하지 않고, 의견이 달라도 상대의 선의를 헤아리며,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이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사랑의 정신입니다.
시니어 생활 사례 — 걱정을 잔소리로만 들었던 아버지

한 70대 남성은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는 데 익숙했고, 자녀에게 의지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며 장거리 운전을 줄이고 병원 검진을 받아 보시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늙은이 취급한다고 느껴 화를 냈습니다.
그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너나 잘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상처를 받고 한동안 건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조용해지자 아버지는 이번에는 “자식이 부모 건강에 관심도 없다”고 섭섭해했습니다. 자주 말하면 간섭이고, 말하지 않으면 무관심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어떻게 해도 틀린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미사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대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말투가 조금 서툴렀어도 그 밑에는 아버지를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가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인데 내가 자존심 때문에 화부터 냈다. 미안하다. 검진 예약을 도와줄 수 있겠니?” 아들도 아버지를 몰아붙이듯 말한 점을 사과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병원 일정을 정했습니다. 관계가 열린 것은 누가 더 옳은지 결론을 내서가 아니라, 서로의 말 밑에 있는 사랑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는 나이가 들어도 마음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권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존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집을 인정하는 용기가 가족에게 더 깊은 신뢰를 줍니다.
오늘의 실천 — 사랑으로 듣는 다섯 가지 방법

첫째, 반박하기 전에 한 번 숨을 쉬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으면 몸이 먼저 긴장합니다. 그 순간 4초 동안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보십시오. 짧은 멈춤이 감정과 행동 사이에 공간을 만듭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화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상대의 말을 내 말로 다시 확인하십시오. “네 말은 내가 건강검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구나”라고 말해 보십시오. 이것은 동의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제대로 들었다는 표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이 전달되었다고 느낄 때 방어적인 태도를 조금 내려놓습니다.
셋째, 말투보다 의도를 한 번 더 헤아리십시오. 물론 무례한 말까지 모두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은 걱정이 커서 표현이 서툴 수 있습니다. “왜 저렇게 말했을까?”를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로 바꾸면 보이지 않던 사랑이 발견됩니다.
넷째, 하루에 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친절을 베푸십시오. 반찬 한 접시를 나누거나, 성당에서 혼자 있는 교우에게 먼저 인사하거나, 병원에 다녀온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하면 전화 한 통이나 짧은 문자도 좋습니다. “생각나서 연락했습니다”라는 말은 외로운 마음을 살립니다.
다섯째, 밤에 사랑의 거울로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오늘 나는 참고 기다렸는가? 친절했는가? 성을 내거나 앙심을 품지는 않았는가?”라고 물으십시오. 잘못이 보이면 변명 없이 주님께 말씀드리고, 상처 준 사람에게 내일 짧게 사과할 계획을 세우십시오. 회개는 자신을 꾸짖는 데 머물지 않고 행동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한꺼번에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한 사람의 말을 삼 분 동안 끊지 않고 듣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내일은 “고맙다”는 말을 먼저 건네십시오. 사랑은 작은 선택이 쌓여 만들어지는 습관입니다.
기도와 결론 — 오늘 들려오는 초대에 응답하기

하느님께서는 매일 같은 방식으로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날에는 복음과 강론을 통해 분명히 깨우치십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의 서툰 걱정, 자녀의 조심스러운 부탁, 외로운 이웃의 표정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기쁜 소식에는 감사로 춤추고, 슬픈 사연에는 함께 울어 줄 때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의 리듬에 맞춰집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모든 초대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안의 진실을 살피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오는 도움도 받아들여 보십시오. 지혜가 옳다는 사실은 지혜의 자녀들이 맺는 열매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열매는 판단을 줄이고, 한 사람을 더 들어 주고, 친절한 행동 하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사정이 있어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형제자매님도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과 마음을 이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면 공동체와 함께 성찬례를 봉헌하고, 참여하지 못한 교우를 기억해 주십시오. 디지털 공간에서 들은 말씀이 실제 삶의 사랑으로 이어질 때 온라인 선교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이신 주님, 제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신의 초대를 거절했던 완고함을 용서하소서. 말투보다 사랑을 보고, 판단보다 경청을 선택하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마음을 열게 하소서. 성 고르넬리오와 성 치프리아노의 전구로 교회의 일치를 사랑하고, 믿음과 희망을 친절한 행동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오늘 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 한 사람의 말을 삼 분 동안 끊지 않고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말 속에서 발견한 선의를 한마디로 표현해 주세요. “나를 걱정해 주어 고맙다”, “네 마음을 이제 알겠다”라는 짧은 말이 굳은 관계를 풀 수 있습니다.
고감사, 참! 고맙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