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붙은 이름표를 안고 살아갑니다. 직업, 학력, 성공과 실패, 가족 안에서 맡아 온 역할이 나를 설명하는 말이 됩니다. 젊을 때는 그 이름표가 힘이 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어떤 이름표는 무거운 짐이 됩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나는 이제 은퇴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 가족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굳어지면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의 복음은 한 사람이 가장 익숙하면서도 고립된 자리에서 불림을 받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었고 동족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을 수 있지만 공동체의 신뢰를 잃은 채 외롭게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직업명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시고 “나를 따라라”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 짧은 말씀은 마태오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거가 그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신앙의 새 출발은 과거를 지우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선 안에서 과거를 새롭게 바라보고 지금 일어서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관은 장소이면서 마음의 습관입니다.

우리에게 세관은 무엇일까요? 반드시 돈을 다루는 장소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하나씩 계산하는 마음,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 나를 무시했던 말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습관이 마음의 세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계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노후에는 수입과 지출을 잘 관리해야 하고 관계에서도 건강한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문제는 모든 관계를 손익으로만 판단할 때 생깁니다. 배우자가 먼저 사과해야 나도 말하겠다거나, 자녀가 연락하지 않으니 나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마음의 장부는 두꺼워지고 관계는 메말라 갑니다.
예수님의 “나를 따라라”는 말씀은 책임 없는 감정에 끌려가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라는 초대입니다. 누가 먼저 옳았는지보다 누가 먼저 관계를 살릴 수 있는지 묻고, 체면을 지키는 것보다 진실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을 선택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일어난다는 말의 실제 의미

복음은 마태오가 부르심을 듣고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이 동작은 단순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생각만으로는 자리가 바뀌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여 첫 행동을 해야 새로운 길이 시작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좋은 결심을 오래 품는 것보다 짧은 실천 하나가 더 큰 변화를 만듭니다.
오랫동안 성당에 가지 못했다면 미사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서먹해진 형제가 있다면 안부 문자 한 줄을 보내는 일이 일어섬입니다. 성경을 읽고 싶지만 어렵게 느껴진다면 오늘 복음 다섯 절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사람만 부르시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듣고 한 걸음 내디딜 사람을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과거를 지운 다음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완성된 뒤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으며 조금씩 변화됩니다.”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배우는 식탁

마태오가 예수님을 따른 다음 복음의 무대는 식탁으로 옮겨집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과 함께 앉았습니다. 식탁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장소가 아닙니다. 누구를 가족과 이웃으로 받아들이는지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제된 이들과 식탁을 나누며 회복의 문을 여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답하시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자비는 잘못을 눈감아 주는 감상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사람을 그의 잘못 하나로 완전히 규정하지 않고, 책임과 회복의 길을 함께 찾는 용기입니다.
가족 안에서 자비를 실천하려면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는 진실입니다. 상처를 준 행동이 있었다면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둘째는 희망입니다. 그 사람이 변화할 가능성을 닫지 않아야 합니다. 진실 없는 자비는 방임이 되고, 자비 없는 진실은 심판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진실과 희망이 함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은사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에페소서 4장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역할과 은총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는 목자나 교사로 세워졌습니다. 그 목적은 개인의 이름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잘 띄는 재능만 은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능력, 악기를 연주하는 재능, 전문 지식은 분명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약속을 지키는 성실함, 남의 말을 끊지 않고 듣는 인내, 아픈 이를 기억하는 마음도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은퇴한 뒤에는 자신의 능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직장생활에서 얻은 경험은 젊은 사람에게 현실적인 조언이 될 수 있고, 상실을 견딘 사람의 공감은 같은 아픔을 겪는 이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성당의 작은 물건을 고칠 수 있고, 스마트폰을 익힌 사람은 거동이 불편한 교우에게 미사 시간과 복음 영상을 전할 수 있습니다.
60대 교우의 작은 디지털 선교

60대 후반의 한 남성 교우를 가정해 봅시다. 그는 은퇴 뒤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성당 봉사 요청을 받으면 젊은 사람에게 맡기라며 피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가 실수할까 두려웠고 스마트폰도 전화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혼자 사는 옛 동료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연락을 망설였지만 그날 복음의 “나를 따라라”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준비하지 못한 채 전화를 걸었습니다. 조언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들은 뒤 “오늘 자네를 위해 기도하겠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경험 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외로운 사람에게 안부를 묻기로 했습니다. 성당의 도움을 받아 스마트폰 글씨를 크게 바꾸는 법과 복음 링크를 보내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의 선교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전화 덕분에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사례는 부르심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오늘 가진 시간, 경험, 관심을 한 사람과 나누는 순간 평범한 일상이 복음 선포의 자리가 됩니다. 디지털 도구는 목적이 아니라 통로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을 숫자가 아닌 한 영혼으로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오늘 바로 실천하는 다섯 가지 응답

첫째, 내가 앉아 있는 세관을 적어 봅니다. 오래된 원망인지, 실패에 대한 수치심인지, 나이에 대한 체념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모호한 두려움은 이름을 붙일 때 다룰 수 있는 현실이 됩니다.
둘째, 삼 분 안에 할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합니다.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 성경 한 단락, 짧은 기도처럼 부담이 작은 행동이면 좋습니다. 작은 행동이 다음 행동을 부르는 힘이 됩니다.
셋째, 내 은사를 한 가지 기록합니다. 특별한 재능이 떠오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자주 고마워했던 일을 생각해 봅니다. 잘 들어 주는 것, 시간을 잘 지키는 것, 음식을 나누는 것, 정보를 쉽게 설명하는 것 모두 은사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붙여 둔 꼬리표를 하나 떼어 냅니다. “고집 센 사람”, “연락 없는 자녀”, “불편한 교우”라는 이름 대신 그 사람의 사정을 한 번 물어봅니다. 행동의 책임은 분명히 하되 사람의 가능성은 닫지 않습니다.
다섯째, 밤에 하루를 돌아봅니다. 오늘 어디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는지, 내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는지 살펴봅니다. 실패를 발견하면 자책으로 끝내지 말고 내일 할 한 가지를 정합니다.
나이가 아니라 응답이 사명을 만듭니다.

성 마태오의 이야기는 변화의 출발점이 능력이나 평판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길과 우리의 응답임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은 마태오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마태오는 부르심을 내일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 만남으로 한 사람의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대에 복음을 전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응답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 주는 전화, 가족에게 건네는 사과, 아픈 교우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성장시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띄는 성공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자비가 이어질 때 조용히 자랍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를 과거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새 길로 초대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성 마태오처럼 주님의 눈길을 받아들이고 오늘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받은 은사를 공동체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며, 판단보다 자비를 먼저 선택하게 하소서. 나이와 형편을 핑계로 사랑을 미루지 않고 가장 가까운 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고감사, 참! 고맙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